한 여자가 움직임을 동경해 모든 것에 바퀴를 달기 시작했다. 그녀는 (불운하게도) 그림을 그리는 직업을 가졌는데, 그림에마저 바퀴를 달았다. 사람들은 그림에 바퀴를 달면 그림이 서있지 않을 것이라고 그녀를 달랬다. 그럼에도 그녀는 그림에 여러 가지 바퀴를 장착했고 심지어는 터널까지 만들었다. 그녀의 작업실에도 형형색색의 팔레트마저 동그란 바퀴를 달고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다.

        지구상의 수많은 새 중에서 날개 짓만으로 같은 자리를 유지할 수 있는 새는 벌새뿐이다. 크기가 가장 작지만, 날개 짓이 가장 빠른 새로 호버링(공중 정지)이 가능하다. 벌새는 비행물체를 만드는 모든 인간의 꿈에 부합하는 날개 짓을 가졌다. 어떤 여자는 벌새를 사랑했다.

         한 사람이 자신의 피부를 연장할 수 없다는 것에 답답함을 느꼈다. 살갗을 초월해 감각하기, 눈알이 늘어나 먼 곳까지 바라보기, 뼈까지 접어 아주 좁은 틈을 통과하기를 하지 못하는 자신의 몸에 좌절했다. 몸을 갑갑해하면서, 갑갑해하는 생각을 하는 뇌를 지워버리고 싶었다.

  (눈치 챘겠지만) 이 세 사람은 모두 같은 사람이자 글을 쓰는 본인이다. 나는 자주 ‘움직임’만이 현재를 감각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라 믿는다. 영화 <벌새>에서 어른인 ‘영지’가 중학생인 ‘은희’에게 “힘들고 우울할 땐 손가락을 봐. 그리고 한 손가락 한 손가락 움직여. 그럼 참 신비롭게 느껴진다? 아무것도 못할 것 같은데 손가락은 움직일 수 있어.”라고 말한다. 손가락을 움직이다 보면 어느새 붓을 들고 있고 그림을 옮기고 있고 다음 그림을 상상하는 나를 발견할 수 있다.
  나에게 중요한 움직임은 손가락 하나하나를 움직이는 아주 사소한 움직임부터 시작해 2D에서 3차원, 4차원까지 넘나드는 움직임까지 포함한다. 그 움직임으로 내가 도달하고자 하는 곳은 미래도 과거도 아닌 현재다. 개인적인 사건으로 인해 현재에 균형을 잡고 발붙이고 있는 것이 삶을 지속 하는 것에 가장 중요한 일이 되었다.
  그렇게 현재를 감각하며 내 몸보다 뛰어난 움직임을 가진 것을 화면에 옮긴다. 주로 어린 시절 보았던 2D 애니메이션 캐릭터들이다. 캐릭터들이 가진 몸의 탄력성은 인간이 해낼 수 없는 궤도로 움직임을 만들어낸다. 직각의 계단을 따라 몸이 접히기도, 큰 관악기가 귀에서 튀어나오기도, 꽝 닫힌 문 뒤로 몸이 납작해지기도 가능하다. 이 캐릭터들은 또한 시간이 많이 지나도 먼지가 쌓이지 않으며 다음 화에 다시 멀끔한 신체로 나타난다. 트라우마를 겪지 않는 이 대상은 우리에게 출처를 알 수 없는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나는 굴러가는 그림들을 가지고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어딘가로 가야만 하는 것일까? 동그란 모양의 지구처럼 ‘자꾸 걸어 나가면 온 세상 어린이를 다 만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현재가 중요한 나는 모순적이게도 나의 어린 시절도 중요해졌다. 가장 좋은 것과 언어들만 골라 나의 어린이에게 건네주고 싶다는 욕심을 부린다. 내 과거의 어린이가 행복하면 나도 곧 행복한 일이 되는 것만 같았다. 타임슬립이나 평행우주 같은 아주 어렵고 복잡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니다. 단순한 바람에서 시작한 일도 어떤 사람의 인생을 완성해나가기도 하니까. 나는 나의 어린이가, 모두의 마음속의 어린이가 행복하길 바란다.
2025 이은 작업노트